콩고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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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콩고 왕국은 14세기 말 니미 아 루케니에 의해 콩고 강 유역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건국되었다. 15세기에는 중앙 집권화된 정치 체제와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으며, 1483년 포르투갈과의 접촉 이후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후 노예 무역의 확대와 왕권 약화, 내전으로 인한 분열을 겪다가 1914년 포르투갈에 의해 멸망했다. 콩고 왕국은 1665년 음빌라 전투 패배 이후 킴판주와 킨라자 두 세력으로 분열되었고, 18-19세기에는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콩고 왕국의 경제는 짐부(nzimbu)라는 조개 껍데기를 화폐로 사용했으며, 시장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이 이루어졌다. 사회는 모계 혈통을 따랐으며, 군대는 궁수와 중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콩고 왕국은 키콩고어를 사용하며 조각 예술 등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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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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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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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
일반 명칭 | 콩고 |
상태 | 주권 왕국 (1390년–1857년) 포르투갈 왕국의 속국 (1857년–1910년) 포르투갈 제1공화국의 지배 (1910년–1914년) |
건국 | 1390년 |
멸망 | 1914년 |
건국 사건 | 카붕가 정복 |
멸망 사건 | 폐지 |
이전 국가 | 음펨바 카시 음바타 왕국 분구 음펨바 콩고 디아 늘라자 7왕국 |
후계 국가 | 국제 콩고 협회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 프랑스령 콩고 |
수도 | 상살바도르 (현재의 음반자콩고, 앙골라) |
공용어 | 키콩고어 포르투갈어 |
정부 형태 | 입헌 선출 군주제 |
통치자 칭호 | 마니콩고 |
초대 통치자 | 루케니 루아 니미 |
초대 통치자 재위 기간 | –1420년 |
마지막 통치자 | 마누엘 3세 |
마지막 통치자 재위 기간 | 1911–1914년 |
종교 | 부콩고 가톨릭교 안토니오니즘 (1704–1708년) |
통화 | 은짐부 조개껍데기 및 루붕고(리봉고, 음봉고), 음푸수 옷감 |
입법부 | 네 음반다-음반다 |
역사적 사건 | |
기독교화 | 1491년 5월 3일 |
음붐비 전투 | 1622년 |
음반다 카시 전투 | 1623년 |
음브윌라 전투 | 1665년 10월 29일 |
콩고 내전 | 1665년–1709년 |
재통합 | 1709년 2월 |
속국화 | 1857년 |
베를린 회의 | 1884년–1885년 |
통계 | |
면적 (1623년) | 129,400 km² |
인구 (1623년) | 약 790,000명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앙골라 콩고 민주 공화국 콩고 공화국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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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콩고 왕국의 초기 역사는 16세기 후반부터 기록된 구전 전통과 17세기 이탈리아 카푸친 선교사 등의 기록을 통해 파악된다.[16] 이 전통들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으며, 20세기 초 키콩고어 기록 연구 등으로 현대적 분석이 이루어졌다.[17][18][19]
왕국은 14세기경 루케니 루아 니미에 의해 여러 소국을 통합하며 건국된 것으로 여겨진다.[84]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부터 콩고는 중앙 집권화된 정치 체제와 광범위한 무역망을 갖춘 발전된 국가였다. 초기 확장 전쟁을 통해 확보한 인력은 수도 엠반자콩고로 집중되어 중앙 집권화의 기반이 되었으며,[38][29][30] 상아, 구리, 직물 등이 활발히 거래되었다.
1483년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구 강의 도착은 콩고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31] 1485년 양국은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고, 1491년에는 은징가 은쿠우 국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주앙 1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34] 그의 아들 아폰수 1세(1509년경 즉위)는 포르투갈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수도 이름을 상살바도르로 바꾸는 등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다.[34]
그러나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점차 대서양 노예 무역의 확대로 인해 악화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콩고를 주요 노예 공급지로 삼으려 했고, 이는 콩고 사회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아폰수 1세는 노예 무역의 폐해를 지적하며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에게 중단을 요청했으나,[39]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한 포르투갈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콩고는 노예 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왕권이 약화되었고, 1568년에는 자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 군대의 도움을 받으면서 포르투갈에 대한 종속이 더욱 심화되었다.
17세기 중반, 가르시아 2세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사이의 경쟁을 이용해 잠시 중흥기를 이끌었으나, 그의 사후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이를 틈타 1665년 포르투갈 군대가 침공하여 음빌라 전투에서 콩고군을 격파하고 국왕 안토니오 1세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1709년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콩고 내전의 시작점이 되었다.
내전 이후 콩고 왕국은 극심한 분열을 겪으며 쇠퇴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중앙 권력이 약화된 틈을 타 지역 귀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노예 무역과 이후의 상품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1839년 노예 무역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후에는 상아, 고무 등 상품 무역이 중심이 되었으나, 이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정치적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다.[17][53]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콩고 왕국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1885년 베를린 회의에서 콩고 영토는 벨기에와 포르투갈에게 분할되었고, 1888년 콩고 왕은 포르투갈의 보호국 지위를 받아들였다. 결국 1914년, 포르투갈은 반란을 진압하고 콩고 왕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하여 직접적인 식민지 통치를 시작했고, 이로써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1. 왕국의 건국
콩고 왕국이 세워지기 전, 해당 지역은 여러 소규모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1580년대 중반에 기록된 구전 전통에 따르면, 은둔디, 음반구, 음바타, 잉기시 강 동쪽의 은둔디, 완두 남쪽의 곤고 등이 있었고, 중앙에는 음펨바, 콩고 강 남쪽 해안에는 소요와 음밤바 등이 존재했다. 13세기에는 크게 세 개의 국가 연합이 있었는데, 동쪽에는 콩고 디아 닐라자의 7개 왕국(Nsundi, 음바타, Mpangu, 쿤디, Okanga 포함 추정), 남쪽에는 엠펨바(엠펨바 카시, Vunda 포함), 서쪽에는 콩고 강 건너 Vungu, 카콩고, Ngoyo 연합이 있었다.[20]17세기 콩고 전통에 따르면, 왕국의 기원은 콩고 강 북쪽의 작은 정치 단위인 붕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붕구의 통치자 왕조는 크윌루 계곡(Nsi a Kwilu)을 따라 지배력을 확장했으며, 엘리트들은 그 중심부 근처 신성한 매장지에 묻혔다. 이탈리아 카푸친 수도사 지롤라모 다 몬테사르키오는 1650년대 이 지역을 방문하고 너무 신성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라고 기록했다.[17] 이 장소는 15세기부터 동굴과 암각화가 있는 로보의 고지대일 수 있다.[21][22]
본격적인 왕국 건설은 1375년경, 엠펨바 카시와 붕구의 통치자였던 니미 아 닌지마가 이웃한 음바타 왕국의 통치자 나사쿠 라우(Nsaku Lau)와 동맹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니미 아 닌지마는 나사쿠 라우의 딸인 루케니 루아 난제(Luqueni Luansanze)와 결혼했다.[17][23] 이 동맹은 각자의 영토에서 상대방 혈통의 계승을 보장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음바타는 "콩고 왕의 조부"(Nkaka andi a Mwene Kongo|응카카 안디 아 므웨네 콩고kg)라는 칭호를 가졌던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동맹에서 더 우위를 점했을 수 있다.[24]
니미 아 닌지마와 루케니 루아 난제의 아들인 루케니 루아 니미[17](1380년경-1420년경)가 콩고 왕국 건국의 실질적인 확장을 이끌었다. 후대의 구전 전통에서는 그를 '니미 아 루케니'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며, 잔 퀴블리에와 같은 현대 역사가들이 이 이름을 대중화했다. 루케니 루아 니미는 남쪽으로 확장하여 음펨바가 지배하던 땅으로 들어갔다. 그는 몽고 디아 콩고 산에 새로운 수도를 정하고, 당시 음펨바에 충성하던 시장 마을 통치자 므웨네 음팡갈라(Mwene Mpangala), 서쪽의 유명한 성지를 가진 므웨네 카붕가(Mwene Kabunga), 그리고 음펨바의 또 다른 하위 통치자였던 분다(Vunda)와 동맹을 맺었다. 특히 분다와의 동맹은 중요했는데, 루케니 루아 니미는 그에게 왕국의 선거인 자격을 부여하며 동맹을 공고히 했다.[24] 2세기 후에도 므웨네 카붕가의 후손들은 매년 축제에서 상징적으로 이 정복에 도전했다고 전해진다.
니미 아 루케니(루케니 루아 니미) 사후, 그의 뒤를 이은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그의 칸다(kanda, 혈통)에 속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들은 킬루케니(Kilukeni)로 알려졌다. 포르투갈어 문서에 기록된 킬루케니 칸다, 즉 '가문'은 1567년까지 콩고를 통치했다.[25]
콩고 왕국의 건국과 초기 역사에 대한 구전 전통은 16세기 후반에 처음 기록되었고, 17세기 중반 이탈리아 카푸친 수도회 선교사 조반니 카바치 다 몬테쿠콜로 등에 의해 더 자세히 기록되었다.[16] 건국 신화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구전 전통에 대한 현대적 연구는 1910년대 음페텔로 보카와 리에반 사칼라 보쿠가 Kikongo|키콩고어kg로 기록하면서 시작되었고, 잔 퀴블리에와 조제프 드 몽크 같은 레뎀토리스 선교사들에 의해 확장되었다. 퀴블리에는 1934년 《Nkutama a mvila za makanda》라는 책에 키콩고어 자료를 요약하여 발표했다.[17] 퀴블리에 등은 이 전통들이 콩고 초기 역사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씨족(makanda)의 지역 전통, 특히 1750년 이후 시대와 더 관련이 깊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8][19]
2. 2. 초기 발전과 포르투갈과의 만남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 콩고 왕국은 이미 중앙 집권화된 정치 체제를 갖추고 활발한 교역망을 통해 발전하고 있었다.[84] 왕국은 초기 확장 전쟁을 통해 확보한 전쟁 포로들을 수도 엠반자콩고로 이주시켜 인구를 집중시켰고, 이는 중앙 집권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8][29][30] 수도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으며, 15세기 말 포르투갈인들은 엠반자 콩고를 당시 포르투갈 도시 에보라만큼 큰 도시로 묘사했다.[30] 콩고는 상아, 구리, 철 제품, 라피아 직물, 도자기 등을 생산하고 거래하는 광범위한 무역망의 중심지였다. 사람들은 키콩고어를 사용했다.
1483년,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구 강이 콩고 강 하구에 도착하면서 두 왕국 간의 교류가 시작되었다.[31] 1485년에는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고, 포르투갈은 기독교 전파를, 콩고는 선진 문물 도입을 기대하며 동등한 관계를 맺었다. 디오구 강은 콩고 귀족들을 포르투갈로 데려갔다가 1485년에 함께 돌아왔고, 이는 양국 간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32] 1491년,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사들이 콩고에 도착했고, 당시 왕이었던 은징가 은쿠우(Nzinga a Nkuwu)는 세례를 받고 포르투갈의 주앙 2세의 이름을 따 주앙 1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34] 그의 아들 은징가 음벰바 역시 세례를 받고 아폰수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포르투갈 유학길에 올랐다.
1509년경 주앙 1세가 사망하고, 포르투갈 유학 경험이 있던 아들 콩고의 아폰수 1세가 왕위에 올랐다.[34] 그는 이복형제 엠판주 아 키티마와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승리했는데, 이때 성 야고보와 성모 마리아의 환영을 보았다고 전해지며, 이를 기념하여 콩고 왕국의 새로운 문장을 만들었다.[35] 아폰수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등 적극적인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수도 이름도 엠반자 콩고에서 상살바도르(포르투갈어로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로 바꾸었다. 그는 왕실 재정과 세금으로 교회를 지원하고 성직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며 콩고의 가톨릭교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포르투갈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아폰수 1세는 기존 콩고의 전통과 기독교를 융합한 혼합주의적 신앙 체계를 구축했는데, 이는 콩고 문화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 잡았다.[36]

콩고 교회는 성직자 수가 부족했지만, 교육받은 귀족 출신 평신도 교사(키콩고어: alongi a aleke, 포르투갈어: mestres)들을 통해 이를 보완했다. 이들은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는 동시에, 'ukisi'(신성함)나 'nkanda'(책) 같은 키콩고어 단어를 사용하여 성경을 'nkanda ukisi'(신성한 책), 교회를 'nzo a ukisi'(신성한 집)로 부르는 등 기독교와 전통 신앙의 결합을 촉진했다.[36] 아폰수 1세는 아들 엔리케를 유럽으로 보내 신학 교육을 받게 했고, 엔리케는 1518년 아프리카인 최초의 가톨릭교회 주교(우티카의 명목 주교)가 되어 콩고로 돌아와 교회를 이끌었다.[37]
그러나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점차 노예 무역 문제로 인해 악화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콩고 왕국을 대서양 노예 무역의 주요 공급지로 삼으려 했고, 이는 콩고 사회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아폰수 1세는 콩고가 황폐화되고 있다며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에게 노예 무역 중단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포르투갈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를 무시했다. 결국 콩고는 점차 노예 무역의 중심지로 변질되어 갔다.
2. 3. 노예 무역의 확대와 왕권 약화
콩고 왕국에는 건국 초기부터 노예제가 존재했다. 초기 영토 확장 전쟁 과정에서 많은 전쟁 포로가 발생했으며,[38][29] 이들을 왕궁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전통은 국왕 권력의 핵심 요소였다. 이러한 노예화와 인구 이동 방식은 훗날 콩고가 효율적인 노예 수출국이 되는 배경이 되었다. 콩고의 법과 문화는 자유민 콩고인들이 노예가 되는 것을 보호했기 때문에, 노예 인구의 대부분은 전쟁 포로로 구성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도 노예가 될 수 있었지만, 초기에는 왕국 밖으로 팔려나가지 않도록 보호받았으며,[8][38] 여성 노예의 수출 또한 금지되었다.[38] 아폰수 1세 시기 초기 서한에는 이미 국내 노예 시장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다.[39][38]
16세기 초, 콩고와 포르투갈 간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교역량이 증가했다. 주요 교역품은 야자나무 천, 구리, 상아였으나, 노예의 거래 또한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38] 초기에는 노예 수출량이 적었지만, 포르투갈이 상투메 섬에 사탕수수 농장 식민지를 성공적으로 건설하면서 콩고는 상투메의 상인과 농장을 위한 주요 노예 공급처가 되었다. 1502년 칸티노 해도에는 콩고가 상투메 식민지의 노예 공급원으로 언급되지만, 그 수는 아직 적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폰수 1세의 서신에도 국내 노예 매매와 전쟁 포로를 포르투갈 상인에게 넘겨 판매한 기록이 나타난다.[40]
아폰수 1세는 1540년대까지 영토를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며 왕국의 성장을 이끌었다. 인구 증가와 초기 종교 개혁은 아폰수 1세가 수도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군주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일부 교역품에 대한 왕실 독점권을 확립하기도 했다.[40][38] 아폰수 1세와 여러 포르투갈 국왕들은 증가하는 노예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해외 노예 무역에 대한 공동 독점을 주장했다.[40][38]
그러나 노예 무역 규모가 커지면서 점차 콩고 왕국의 기반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상투메에 기반을 둔 포르투갈 상인들은 왕실의 노예 무역 독점을 무시하고 다른 아프리카 지역 국가들과 직접 거래하기 시작했다. 또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콩고의 유력 귀족들과 직접 물품을 거래하며 왕실의 세수입을 감소시켰고, 콩고에 거주하는 포르투갈 사제와 상인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져갔다.[38][41] 엠판잘룸부(아폰수 1세가 1526년 정복한 반란 지역)나 암분두족의 응돈고 왕국과 같은 새로운 노예 시장의 등장은 콩고의 노예 무역 독점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8][38]
1526년, 아폰수 1세는 주앙 3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의 독점 위반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며, 포르투갈 관리들의 소극적인 규제를 지적하고 노예 무역을 완전히 중단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일부 부도덕한 귀족들이 노예 무역 수요를 맞추기 위해 자유민 콩고인들까지 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폰수 1세는 노예 무역의 폐해를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해 콩고 법 준수와 자유민 노예화 금지를 재차 강조하는 한편, 노예 무역을 더 엄격하게 규제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했다. 또한 판매되는 사람들의 노예화가 합법적인지를 판별하는 특별 위원회도 만들었다.[39]
하지만 포르투갈은 아폰수 1세의 요청을 사실상 무시했다. 포르투갈 왕실은 오히려 콴자강을 통해 응돈고와 직접 교역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560년, 포르투갈은 파울루 디아스 드 노바이스를 응돈고에 대사로 파견했으나, 응돈고 측은 군사적 지원을 원했기에 외교 관계 수립에만 관심 있는 포르투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575년, 포르투갈은 노바이스의 지휘 아래 응돈고를 정복하고 노예 무역을 독점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42] 이러한 포르투갈의 팽창 정책과 노예 무역 확대는 콩고 왕국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내부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 4. 콩고 내전 (1665년-1709년)
1641년에 즉위한 가르시아 2세(Garcia II)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사이의 경쟁 구도를 활용하여 왕국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고, 그의 통치 아래 콩고 왕국은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으며 중흥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가르시아 2세가 사망한 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 혼란이 발생했다.이러한 혼란을 기회로 삼아, 1665년 앙골라 지역에 있던 포르투갈 군대가 콩고 왕국을 침공했다. 음빌라 전투(Battle of Mbwila)에서 콩고 왕국군은 포르투갈 군대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당시 국왕이었던 안토니오 1세(António I)는 전투 중 자신의 신하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 패배와 국왕의 죽음은 콩고 왕국을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었으며, 이를 계기로 1709년까지 계속되는 오랜 콩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2. 5. 18-19세기: 분열과 기업가적 귀족의 등장
1750년대 이후, 콩고 왕국에는 새로운 형태의 귀족 계급이 등장했다. 이들은 본래 하위 귀족이었으나, 약탈과 노예 포획을 통해 세력을 키우고 자신들의 통제 하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했다.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화된 틈을 타 상위 귀족들의 영토에 요새화된 거점을 마련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는데, 이는 마치 기득권 세력이 국가의 혼란을 틈타 사익을 추구하는 모습과 유사했다. 이러한 귀족 중 가장 악명 높았던 인물은 '미친 개'라는 뜻의 엠바 라우(Mbwa Lau)로, 그는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요새를 짓고 세력을 떨쳤다. 당시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로앙고(Loango) 상인들(빌리(Vili)라고 불림)에게 노예를 팔지 말 것을 콩고 귀족들에게 요구했는데, 이는 로앙고 무역에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관여하여 가톨릭 신자가 프로테스탄트에게 팔려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엠바 라우는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사제를 학대하며 위협했다. 이처럼 새롭게 부상한 귀족들은 지역적인 정치 및 경제적 권력을 추구하면서 노예 무역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이들의 소규모 전쟁과 약탈은 콩고에서 신세계로 향하는 노예 공급을 더욱 부추겼다.1839년, 포르투갈 정부는 영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적도 이남의 노예 무역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하지만 인신매매는 불법적인 형태로, 이후에는 계약 노동이라는 명목으로 1920년대까지 근절되지 않았다. 노예 무역이 쇠퇴하면서 상아와 밀랍을 시작으로 땅콩, 고무 등이 주요 교역품으로 떠오르는 상품 무역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러한 변화는 중앙아프리카 전체의 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과거 국가 당국의 통제 하에 이루어졌던 노예 무역과 달리, 상품 무역 시대에는 수많은 일반 백성들이 내륙에서 해안 항구까지 상품을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새로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며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17][53]
노예 무역 종식 이후 장거리 상품 무역이 활발해지자, 기업가적 성향의 귀족들은 시장을 개설하고 무역로를 보호하며 더욱 안정적인 기반을 다졌다. 이 과정에서 '마칸다(makanda)'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이 등장했다. 마칸다는 명목상 공통 조상을 둔 씨족 형태를 띠었지만, 실제로는 혈연 공동체라기보다는 무역 협회의 성격이 강했다. 이들 씨족은 보마(Boma)나 소요(Soyo) 해안에서 상 살바도르를 거쳐 내륙으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따라 가상의 친족 관계로 연결된 마을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심지어 왕국 건국 설화(흔히 아폰수 1세와 관련된)도 왕이 씨족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면서 왕국이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재해석되었고, 많은 지역에서 이러한 씨족의 역사가 왕국 전체의 역사를 대체하게 되었다.[17]

격렬한 내부 경쟁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콩고 왕국은 19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킴판주(Kimpanzu) 파벌의 알바루 농고(Álvaro Ndongo)와 킨라자(Kinlaza) 파벌의 페드루 렐루(Pedro Lelo)가 대표적인 경쟁자들이었다. 오랜 군사적 대립 끝에 페드루 렐루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1859년 알바루 13세를 물리치고 페드루 5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지원에는 대가가 따랐다. 페드루 5세는 포르투갈에 대한 봉신 조약을 체결해야 했고, 이로써 포르투갈은 명목상 콩고에 대한 권위를 확보하고 상 살바도르에 요새를 건설하여 주둔군을 배치했다. 이에 대해 니콜라스 왕자는 1859년 12월 1일 리스본의 신문 ''호르날 두 코메르시오(Jornal do Commércio)''에 콩고의 봉신 관계에 항의하는 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54][55] 1866년 포르투갈 정부는 과도한 비용을 이유로 주둔군을 철수시켰다.
페드루 5세는 계속해서 콩고를 통치했지만, 그의 권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씨족 기반의 무역 거상들이 강력한 경쟁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 중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마쿠타(Makuta) 마을의 가르시아 엠바카 마투(Garcia Mbwaka Matu)였다. 마쿠타 마을은 기업가적 귀족 쿠보(Kuvo)가 세웠으며, 그의 후계자들은 새로운 상품 무역 체제에서 시장을 장악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르시아는 1870년대 페드루 5세에게 큰 위협이었으나, 1880년 그가 사망하면서 마쿠타의 위세는 꺾였다.[56]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분할을 결정했고, 포르투갈은 독립적인 콩고 왕국의 남은 영토 대부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은 '효과적인 점령'을 실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페드루 5세는 1891년 사망할 때까지 포르투갈을 이용하여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하려 했고, 1888년에는 자발적으로 포르투갈의 봉신국 지위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결국 1914년, 포르투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포르투갈은 당시 통치자였던 마누엘 3세를 폐위시키고 콩고 왕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이로써 원주민에 의한 통치는 종식되고 포르투갈의 직접적인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다.
2. 6.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와 멸망
1885년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콩고 왕국의 영토는 벨기에와 포르투갈이 나누어 지배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1888년, 콩고의 왕(마니콩고)은 포르투갈에 종속적인 관계를 맺고 보호국이 되었다. 이는 콩고 왕국의 주권이 크게 제약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1910년 포르투갈 공화혁명의 결과로, 1914년 포르투갈 정부는 콩고 왕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편입하고 총독에 의한 통치로 일원화하였다. 이로써 명맥을 유지하던 콩고 왕국은 최종적으로 멸망하였다.3. 정치 구조
콩고 왕국의 정치 체제는 초기에는 므웨네 콩고(왕)를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 성격을 가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정 운영은 므웨네 콩고와 왕실 의회인 네 음반다 음반다(ne mbanda-mbanda)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왕위는 선거를 통해 계승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종종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며 내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66][67]
왕국은 여러 주(province)로 나뉘어 통치되었으며, 기본적인 사회 단위는 마을(vata)과 이를 묶는 작은 지역 단위(wene)였다. 국왕은 이론적으로 각 주의 통치자를 임명하고 통제할 권한을 가졌으나, 16세기 말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고 강력한 지방 귀족 세력이 성장하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알바로 1세(Álvaro I)와 알바로 2세(Álvaro II) 시기에는 왕위 계승 경쟁자들과의 갈등 속에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소요 백작(Count of Soyo)이나 맘바 공작(Duke of Mbamba) 같은 유력 귀족들에게 상당한 권한을 양보해야 했다. 이들 지방 세력은 때때로 장기간 직책을 유지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심지어 왕위 계승 결정 과정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내부적인 권력 분산 경향은 포르투갈 세력, 특히 앙골라 총독들의 개입과 충돌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1622년에는 앙골라 총독 주앙 코레이아 드 소우사(João Correia de Sousa)가 콩고의 페드로 2세(Pedro II of Kongo)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처럼 콩고 왕국은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외부 세력의 간섭 속에서 점차 중앙의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는 분권화 경향을 나타냈다.
3. 1. 중앙 정부
콩고 왕국은 므웨네 콩고(Mwene Kongo, 왕)와 왕실 의회인 네 음반다 음반다(ne mbanda-mbanda)가 협력하여 통치했다.[66] 네 음반다 음반다는 "최고 중의 최고"라는 의미를 지닌다.[67] 이 의회는 총 12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으며, 관료, 선거인, 귀부인이라는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67]고위 관리들은 종신직인 므웨네 콩고를 선출했다. 선거인의 구성은 시대에 따라 변했으며, 고정된 명단보다는 당시 권력을 가진 고위 관리들이 그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많은 왕들이 후계자를 지명하려 했으나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왕위 계승 문제는 콩고 역사에서 많은 반란과 혼란을 야기하는 중심적인 문제였다.
왕위 계승 과정에서의 갈등은 귀족 세력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알바로 1세(Álvaro I)와 알바로 2세(Álvaro II)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가문 출신 경쟁자들과 문제를 겪으며, 지지를 얻기 위해 소요 백작(Count of Soyo) 마누엘(Manuel)이나 맘바 공작(Duke of Mbamba) 안토니우 다 실바(António da Silva) 같은 강력한 귀족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안토니우 다 실바는 1614년 콩고의 베르나르두 2세를, 1615년에는 알바로 3세를 왕위에 올릴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알바로 3세는 안토니우 다 실바 사후 맘바 공작 임명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동시에 알바로 3세는 응순디(Nsundi)를 지배하며 자신을 도왔던 또 다른 강력한 귀족 마누엘 조르당(Manuel Jordão)을 등용하기도 했다.
외부 세력인 포르투갈 역시 왕위 계승에 개입하려 했다. 1622년 알바로 3세 사후, 앙골라 총독 주앙 코레이아 드 소우사(João Correia de Sousa)는 임방갈라 용병을 이용해 콩고 남부를 침략하며 자신이 왕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콩고 선거인들이 슨디 왕가(House of Nsundi) 출신의 콩고의 페드로 2세를 선출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페드로 2세는 과거 엠밤바 공작 시절 앙골라에서 도망친 노예들을 숨겨주었다는 비난도 받았다.
왕실 의회 네 음반다 음반다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관료: 국왕이 임명하는 선출되지 않는 네 명의 관료가 있었다. 이들은 궁정 운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므웨네 룸보(Mwene Lumbo, 궁정 총책임자/총집사), 므필라 엔투(Mfila Ntu, 가장 신뢰받는 고문/총리), 므웨네 방구-방구(Mwene Vangu-Vangu, 고등 판사, 특히 간통 사건 담당), 그리고 므웨네 밤파(Mwene Bampa, 재무관)가 포함되었다.[66][68]
- 선거인: 네 명의 선거인은 국왕 선출과 주요 직책 임명에 참여했다. 여기에는 주로 종교적 의무를 맡고 선거인단을 이끈 므웨네 분다(Mwene Vunda, 분다 영주), 왕비족인 인사쿠 라우(Nsaka Lau) 가문이 통치하는 므웨네 음바타(Mwene Mbata, 음바타 영주), 가장 부유한 지역인 소요의 므웨네 소요(Mwene Soyo, 소요 영주), 그리고 군 총사령관 격인 므웨네 음밤바(Mwene Mbamba, 음밤바 영주)가 포함되었다.[69] 각 선거인의 임명 방식은 다양했으며, 므웨네 분다와 므웨네 음바타는 즉위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66]
- 귀부인: 마지막으로 의회에는 네 명의 여성이 참여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그룹은 보통 국왕의 외숙모인 왕대비 므웨네 은짐바 음풍구(Mwene Nzimba Mpungu)가 이끌었다. 다음으로는 국왕의 대왕비인 므웨네 음반다(Mwene Mbanda)가 중요했으며, 나머지 두 자리는 이전 왕의 미망인이나 다른 유력 가문의 여성 지도자에게 돌아갔다.[68][70]
3. 2. 지방 행정
콩고 왕국의 기본적인 사회 단위는 가족 다음으로 바타(vata) 마을이었는데, 콩고 문서와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리바타(libata)라고 불렀다. 마을은 인쿨룬투(nkuluntu) 또는 포르투갈어로 모콜룬투(mocolunto)라고 불리는 족장이 이끌었다. 마을 당 100~200명의 주민들은 토양 고갈을 막기 위해 약 10년마다 이동했으며, 공동 토지 소유와 집단 농장에서 생산된 수확물은 가구당 인원 수에 따라 가족들에게 분배되었고, 인쿨룬투는 분배 전에 특별한 몫을 받았다.마을들은 웨네(wene)라는 작은 단위로 묶여 있었는데, 이는 아웨네(awene, mwene의 복수) 또는 포르투갈어로 마니(mani)가 이끌었다. 아웨네는 1,000~5,000명의 주민이 사는 엠반자(mbanza) 즉, 더 큰 마을이나 작은 도시에 거주했다. 이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고위 귀족들이 선택했으며, 국왕은 후원 체계 하에 3년 임기의 하급 관리들을 임명하여 그를 보좌하게 했다.
콩고의 상위 행정 구역은 여러 개의 주(province)로 구성되었다. 일부 큰 주는 음밤바(Mbamba)처럼 여러 개의 하위 주로 나뉘어 행정부가 더 세분화되기도 했다. 국왕은 각 주의 통치자인 므웨네(Mwene)를 임명했다. 예를 들어 1590년대 이후 국왕은 므웨네 음밤바(Mwene Mbamba) 즉, 음밤바 공작을 임명했다. 이론적으로 국왕은 므웨네를 해임할 권한이 있었지만, 복잡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실제로는 권한 행사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식 칭호가 도입되면서, 음밤바(Mbamba)와 은순디(Nsundi)와 같은 큰 지역은 일반적으로 공국(Duchies)이 되었고, 엠펨바(Mpemba), 엠팡구(Mpangu) 또는 수도 북쪽의 여러 지역들과 같은 작은 지역들은 후작령(Marquisates)이 되었다. 해안에 위치한 복잡한 주인 소요(Soyo)는 백작령(County)이 되었으며, 수도 동쪽에 있는 작고 덜 복잡한 주인 은쿠수(Nkusu)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콩고 왕국의 주요 주는 6개에서 15개까지 다양했다. 16세기 후반 두아르테 로페스는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6개의 주요 주를 언급했다.
주 이름 | 위치 | 유럽식 칭호 | 비고 |
---|---|---|---|
은순디 (Nsundi) | 북동쪽 | 공국 | |
엠팡구 (Mpangu) | 중앙 | 후작령 | |
음바타 (Mbata) | 남동쪽 | 공국 | 인사쿠 라우(Nsaku Lau) 가문이 세습적으로 통제 |
소요 (Soyo) | 남서쪽 | 백작령 | 해안가 위치, 복잡한 구조, 17세기 장기 집권 사례 발생 |
음밤바 (Mbamba) | 남쪽 | 공국 | 크고 복잡, 하위 주 존재, 17세기 장기 집권 사례 발생 |
엠펨바 (Mpemba) | 남쪽 | 후작령 |
몇몇 주, 특히 음바타 공국과 은쿠수 백작령은 특정 가문이 세습적으로 통제했으며, 국왕은 이들을 관리직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음바타의 경우, 왕국 형성 당시 동맹 관계였기 때문에 인사쿠 라우(Nsaku Lau) 가문이 이러한 권력을 누렸다. 17세기에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소요나 음밤바와 같은 주에서 특정 인물이 오랫동안 통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정부는 왕실에 세금을 납부하고 수도에 정기적으로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알바로 1세와 알바로 2세 시기에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가문 출신 경쟁자들과의 갈등 속에서, 왕들이 지지를 얻기 위해 지방 세력에게 양보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소요 백작 마누엘(Manuel)과 음밤바 공작 안토니우 다 실바(António da Silva)는 오랫동안 직책을 유지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안토니우 다 실바는 왕위 계승에 개입할 정도로 강력했으며(베르나르두 2세와 알바로 3세 옹립), 그의 사후 알바로 3세는 음밤바 공작 임명에 어려움을 겪었다. 동시에 알바로 3세는 은순디를 지배하던 또 다른 강력하고 반독립적인 귀족 마누엘 조르당(Manuel Jordão)을 등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중앙 정부와 지방 세력 간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4. 경제 구조
콩고 왕국의 경제는 짐부 껍데기와 이후 라피아 직물을 화폐로 사용하는 교환 경제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왕국의 주요 재정 수입원은 각 마을 주민에게 부과하는 인두세와 왕국을 통과하는 무역품에 매기는 통행세였다. 콩고 행정부는 토지를 일종의 수입 배정지(rendapt)로 간주했으며, 왕은 이 인두세를 기반으로 귀족들에게 작위와 수입원을 부여하고 매년 이를 평가하여 갱신했다. 지방 주지사들은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걷은 세금의 일부를 왕에게 납부해야 했다. 1640년대 콩고를 방문했던 네덜란드인들은 당시 왕국의 연간 수입이 2천만 개의 짐부 껍데기에 달한다고 기록했다.[71][72]
왕실은 또한 "콩고 디아 냐자 칠왕국"이라 불리던 대규모 직물 생산 지역이나 동부 지역, 그리고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루안다와의 교역 등 주요 무역로에 통행세를 부과하여 추가적인 수입을 확보했다. 특히 포르투갈과의 접촉 이후에는 노예 무역이 크게 확대되어 왕국의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왕실 수입의 일부는 교회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페드로 2세(재위 1622-1624)는 다양한 영지와 지방 수입을 통해 왕실 예배당의 재정을 지원했으며, 세례식이나 장례식 비용 등도 지역 교회를 지원하는 데 쓰였다.
콩고인들의 경제 및 사회 활동은 nzandukg라고 불리는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시장은 안전한 상거래를 보장하는 중립 지대였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기능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4. 1. 통화
콩고 왕국과 중앙아프리카 주변 지역에서 통용되던 화폐는 ''올리벨라 나나''(Olivella nanala)라는 바다 달팽이의 껍데기로, 현지에서는 '''짐부'''(nzimbukg)라고 불렸다.[71][72] 짐부 껍데기는 루안다 섬에서 채취되었으며 왕실이 독점적으로 관리했다. 채취된 껍데기 중 작은 것은 걸러내고 큰 껍데기만 화폐로 유통되었다. 콩고는 금이나 은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짐부 껍데기는 특정 단위로 항아리에 담겨 모든 종류의 물품 거래에 사용되었다. 콩고의 "돈 항아리"에는 40, 100, 250, 400, 500개 단위의 짐부가 들어 있었다.
포르투갈과의 접촉 이후, 콩고 경제의 일부였던 노예 무역의 규모는 더욱 증가했다.
1651년, 가르시아 2세 국왕이 루안다 섬과 왕실 어장을 포르투갈에 넘겨주면서 짐부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왕국은 화폐를 라피아 직물로 전환했다. 이 직물은 "냅킨 크기"였으며 mpusu|음푸수kg라고 불렸다. 17세기에는 음푸수 100개로 노예 한 명을 살 수 있었는데, 이는 짐부 화폐보다 가치가 더 높았음을 시사한다. 라피아 직물은 '''루봉고'''(Lubongokg; 단수: ''Lubongo'', ''Libongo'', 복수: ''Mbongo'')라고도 불렸다.[74][75][76][77]
4. 2. 시장
콩고인들의 경제 및 사회 활동의 중심에는 nzandu|은잔두kg라고 불리는 시장이 있었다. 시장은 평화로운 상업 활동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으며, 추장의 권위 아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중립 지대로서 안전이 보장되었다. 이곳에서는 자유로운 무역이 이루어졌고 가격 표준화가 시행되었다.[78]시장 내에는 상품을 진열하는 구역인 mbangu|음방구kg가 있었는데, 대장간 장비나 노예 등 상품 종류별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상업 중심지를 넘어, 정치적 협상이나 결혼 관련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소였으며, 새로운 소식이 퍼져나가는 곳이자 범죄자를 처형하는 장소, 그리고 주술사의 의식이 행해지는 등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78]
시장들은 여러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15세기 후반에는 부유한 상인들이 여행객을 노리는 산적인 mpanzulungu|음판줄룽구kg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 경호를 받기도 했다. 이 도로들은 통행세 징수를 통해 유지되었으며, 이는 수도의 수입원이 되었다. 도로 유지에는 강제 노역이 동원되기도 했다.[78]
5. 사회 구조
콩고 왕국을 구성했던 주요 반투족들은 모계제를 통해 지위를 계승했다.[82] 이러한 특징은 사회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여성은 사회 및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의회에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네 명의 여성이 참여했다. 이들은 주로 국왕의 외숙모인 왕대비(Mwene Nzimba Mpungu)가 이끌었으며, 다음으로는 은사쿠 라우(Nsaku Lau) 칸다(kanda, 씨족) 출신의 대왕비(Mwene Mbanda)가 권력을 가졌다.[68] 나머지 두 자리는 왕국의 다른 중요한 여성들, 예를 들어 과부가 된 왕대비나 이전 통치 칸다의 여족장에게 주어졌다.[70] 또한, 콩고 왕국의 속주였던 지역에서는 여성이 통치자나 전쟁 지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17세기 은돈고(Ndongo)와 마탐바(Matamba) 지방을 다스렸던 은징가 음반데 여왕이 있다. 그녀는 유능한 통치자이자 군사 지도자로서 포르투갈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며, 1663년 고령으로 사망할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83]
18세기 중반 이후 콩고 사회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새로운 귀족 계급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주로 하위 귀족 출신으로, 약탈과 주민 포획을 통해 세력을 키우고 요새화된 마을을 건설했다. 이들은 중앙 권력의 약화를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으며, 엠바 라우(Mbwa Lau, '미친 개'라는 뜻)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상위 귀족들 역시 변화에 적응하며, 사로잡은 이들이나 보호를 원하는 일반 백성들을 모아 자신들의 마을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귀족들은 지역적인 정치 및 경제적 권력을 추구했으며, 노예 무역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귀족들의 소규모 전쟁과 약탈은 콩고에서 신세계로 향하는 노예 공급을 부추겼고, 이는 콩고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시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1839년 포르투갈 정부가 영국의 압력으로 중앙 아프리카 남부의 노예 무역을 폐지하면서[17][53] 콩고 사회는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이했다. 인신매매는 불법적인 형태로, 이후에는 계약 노동 형태로 1920년대까지 지속되기도 했으나, 점차 상품 무역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초기에는 상아와 밀랍이 주요 교역품이었으나, 점차 땅콩과 고무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 새로운 무역은 수많은 일반 백성들이 내륙과 해안 항구를 오가며 상품을 운반하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고, 이들은 부를 축적하며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고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17][53]
이 시기에는 '마칸다(makanda)'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이 등장했다. 마칸다는 명목상 공통 조상을 둔 씨족이었지만, 실제로는 무역 협회의 성격이 강했다. 이들은 보마(Boma)나 소요(Soyo) 해안에서 수도 상살바도르(São Salvador)를 거쳐 내륙으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따라 가상의 친족 관계로 연결된 마을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왕국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구전 전통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이는 국왕(아폰수 1세로 여겨짐)이 씨족들을 사방으로 퍼뜨리면서 왕국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씨족들의 역사는 점차 왕국 전체의 역사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17]
6. 군사 구조
콩고 왕국의 군대는 주로 일반 남성 인구에서 징집된 대규모 궁수 부대와, 검으로 싸우고 방패로 자신을 보호하는 소규모 중보병(heavy infantry) 부대로 구성되었다. 포르투갈 문서는 일반적으로 귀족으로 간주되는 중보병을 '피달고스'(fidalgospt)라고 불렀다. 방패를 지니는 것은 중요한 특징이었으며, 포르투갈 문서는 이들을 '아다르게이로스'(adargueirospt, 방패병)라고 칭하기도 했다. 중보병의 방패는 무릎부터 목까지 가릴 수 있었지만, 이들은 별도의 갑옷은 착용하지 않았다. 군사 역사가 웨인 리(Wayne Lee)에 따르면, 대부분의 방패병은 "사브르 모양의 장검"을 사용했다.[57] 방패병의 수는 제한적이어서, 대부분의 콩고 군대에는 약 1,000명 정도만 배치되었다.[58] 특히 콩고 동부 지역의 일부 궁수들은 독화살을 사용하기도 했다.[57][59]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 배정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도 일부 존재한다. 수도 엠반자콩고에는 약 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요 지방에는 지방 통치자의 지휘 아래 더 적은 수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콩고는 검과 같은 유럽 무기를 수입하여 군대에 보급하기도 했다. 1583년 기록에 따르면, 음밤바(Mbamba) 지방의 병사들은 슬라보니아인들이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장검으로 무장했는데, 포르투갈 사절 두아르테 로페스(Duarte Lopez)는 이 검이 "노예를 단번에 둘로 벨 수 있을 정도"라고 묘사했다.[60]
1600년 이후에는 외부와의 전쟁보다는 내전이 훨씬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정부는 전시 상황에서 이론상 전체 인구를 징집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복무하는 인원은 제한적이었다. 무기를 들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짐을 나르거나 보급품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수천 명의 여성들도 이동하는 군대를 지원했다. 병사들은 작전에 투입될 때 약 2주 분량의 식량을 휴대해야 했다. 이러한 병참상의 어려움은 동원 가능한 군대의 규모와 장기간 작전 수행 능력을 제한하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일부 포르투갈 자료에서는 1665년 음빌라 전투 당시 콩고 왕이 7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2만에서 3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61]
군대는 매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축일에 동원되어 사열을 받았으며, 이날 세금 징수도 이루어졌다. 콩고 사람들은 이 날을 아폰소 1세가 1509년 그의 형제를 상대로 거둔 기적적인 승리를 기념하며 성 야고보와 아폰소 1세를 기렸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콩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용병 부대로 편입되어 석궁이나 머스킷과 같은 특수 무기를 다루며 콩고 군대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초기 영향력은 미미했다. 아폰소 1세는 1514년 편지에서 포르투갈 용병들이 전년도 음분두(Mbundu)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1580년대에 이르러서는 현지에 거주하던 포르투갈인과 콩고-포르투갈 혼혈인(메스티소) 중에서 모집된 머스킷병 부대가 수도의 주요 군대에 정규 부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방 군대에도 일부 머스킷병이 있었는데, 이들은 1622년 포르투갈 침략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1665년 음빌라 전투에서 포르투갈군과 맞선 콩고 군대에는 360명의 머스킷병이 포함되어 있었다.[62]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콩고 군대는 화기 사용에 더욱 익숙해졌다. 1781년 페드루 5세 섭정과 조제 1세 사이의 전투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조제 1세의 3만 명 병사들은 "머스킷과 탄환"으로 무장하고 있었다.[63] 이 시기에는 대포도 어느 정도 사용되었다. 역사가 존 손턴(John Thornton)에 따르면, 1790년 포르투갈군과 맞선 콩고 부대는 때때로 대포를 활용했다.[64]
방어 시설로는 1509년 아폰소 1세가 엠반자콩고를 방어하기 위해 도시 주변에 펑지 스틱과 유사한 함정을 설치한 기록이 있다. 이 함정은 땅을 파고 바닥에 날카로운 철제물을 설치한 형태로, 적군을 도시 중앙 광장으로 유인하여 주력 부대와 교전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아폰소 1세의 경쟁자였던 형제 음판주 아 키티마(Mpanzu a Kitima)는 이 대인 살상 무기 함정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64]
해군력에 관해서는, 16세기 초 자료에 통나무 하나로 만든 중앙 아프리카의 군함이 언급되는데, 이 배는 150명까지 수송할 수 있었다. 16세기 콩고는 이러한 군함을 800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1525년에는 콩고 군함 한 척이 포르투갈 선박과 협력하여 소요(Soyo) 해안에서 프랑스 선박을 나포하는 데 기여했다. 콩고 선박은 주로 적의 롱보트에서 내리는 상륙 부대를 공격하거나 나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65]
17세기 중반, 콩고는 포르투갈과의 갈등에 다시 휘말렸다. 네덜란드가 앙골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자, 포르투갈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칭가 여왕과 대립했다. 1646년 포르투갈이 칭가 여왕의 군대를 격파하자, 칭가 여왕은 콩고의 가르시아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647년, 콩고군은 콤비 전투에 참여하여 포르투갈 야전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648년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네덜란드는 앙골라에서 철수했고, 포르투갈은 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 새로운 포르투갈 총독 살바도르 드 사는 콩고의 화폐(은짐부 조개) 공급원인 루안다 섬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도했으나,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음에도 포르투갈이 사실상 섬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콩고는 가르시아 2세가 지불한 배상금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영토 변화는 겪지 않았지만, 포르투갈과의 긴장 관계는 지속되었다.
7. 문화
콩고 왕국은 키콩고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 집단이 어우러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으며, 특히 예술, 건축, 종교 분야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
7. 1. 예술

콩고인들은 욤베족, 베엠베족, 순디족 등 여러 하위 집단으로 나뉘지만, 키콩고어라는 공통 언어를 사용한다. 이 집단들은 조각 예술을 포함한 많은 문화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콩고 지역 조각 양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과 동물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얼굴과 몸의 근육 표현이 세심하며, 개인 장신구나 상흔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예술 작품의 상당수는 콩고 왕과 같은 사회 및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제작되었다.[79]
7. 2. 건축
엠반자콩고(M'banza-Kongo)의 수도에 최초로 세워진 돌과 시멘트 건물은 1491년 6월 1일 포르투갈 장인들이 콩고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건설한 교회였다.[80] 16세기 초 아폰수 1세 통치 기간 동안 콩고 수도에는 여러 돌 건물이 건설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왕궁 주변과 포르투갈인들에게 할당된 지역에 돌담을 쌓았다. 이 담은 높이 약 4.57m~약 6.10m, 두께 약 0.76m~약 0.91m에 달했다. 아폰수 1세는 또한 1509년부터 돌로 된 교회와 궁전을 건설했다. 학자 래스본(Rathbone)에 따르면, 국왕은 돌 건물을 건설하고 수리할 수 있는 콩고인 기술자들을 성공적으로 육성했다.[81] 17세기 중반 수도가 가장 번성했을 때, 도시에는 돌로 된 대성당과 예배당은 물론 예수회 대학이 있었고, 거리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집 모두 이웃집과의 경계를 구분하는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81]7. 3. 종교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콩고의 예술가들은 예수를 아프리카인으로 묘사한 십자가를 비롯한 다양한 기독교 관련 물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물건들은 오랜 기간 여러 공방에서 만들어졌으며, 콩고가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부라는 새로운 인식을 반영했다.특히 18세기에는 상 살바도르에 위치한, 부분적으로 파괴된 대성당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본래 1549년 예수회를 위해 지어졌다가 나중에 대성당으로 승격된 이 건물이 천사들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세워졌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이 대성당은 콩고인들에게 '은쿨룸빔비'(Nkulumbimbi)라는 애정 어린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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